하라 다카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라 다카시는 1856년 모리오카 번의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나, 외무성, 농상무성, 마이니치 신문 사장 등을 거쳐 입헌정우회 총재를 역임했다. 1918년 총리로 임명되어 교육, 교통, 국방, 산업 진흥 등의 정책을 추진했으며, 중화민국과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고 미국, 영국과 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1921년 도쿄역에서 암살당했으며, 그의 암살은 일본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평민 출신으로 정당 정치 발전에 기여했으나, 보통선거 도입에 소극적이었고 사회 운동을 탄압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하라 다카시 - 다이쇼 데모크라시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러일 전쟁 이후 시민 계급 성장과 국제 정세 변화를 배경으로 일본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운동 및 사회 변혁으로, 민본주의, 천황기관설 등의 이론적 토대 위에 호헌 운동, 쌀 소동, 보통선거법 제정 등을 통해 정당 내각제 발전과 의회 정치 확립을 가져왔으나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몰락하며 군국주의로 이행, 전후 민주주의 기반 형성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파시즘으로 이어진 측면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공존한다. - 하라 다카시 - 일본 철도성
일본 철도성은 메이지 시대에 설립되어 교통통신부로 통합되기 전까지 일본의 철도 administration을 담당했던 행정 기관으로, 철도망 정비, 전기화 추진, 육상 교통 부문 관할 등의 사업을 수행했다. - 독일-일본 전쟁 관련자 - 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활동한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육군대신, 한국통감,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한국 병합을 주도하고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며, 시베리아 출병 등 외교 정책을 펼친 일본 제국주의 핵심 인물이다. - 독일-일본 전쟁 관련자 - 오쿠마 시게노부
오쿠마 시게노부는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이자 교육자로, 두 차례 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재정 개혁, 철도 건설, 헌법 제정, 와세다 대학 설립 등에 기여했으나, 제국주의적 정책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등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 일본의 철도인 -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일본 근대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실업가이자 사상가로, 500개가 넘는 기업 설립 및 경영에 참여하며 "도덕경제합일설"을 주창했고 사회 및 교육 사업에도 헌신했다. - 일본의 철도인 - 마에지마 히소카
마에지마 히소카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우편 제도 창설과 근대화에 기여하여 "우편의 아버지"로 불리며, 한자 폐지론 주장, 에도 천도 건의, 철도 부설 기안, 신문 사업 육성, 육운 원회사 창립, 해운 정책 건의, 우편 저축 및 우편환 시스템 도입, 훈맹원 설립 지원, 도쿄 전문학교 설립 지원 등 일본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사회적 불평등 심화에 대한 비판과 정치적 유산에 대한 재평가 또한 존재하는 인물이다.
하라 다카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하라 다카시 |
원어 이름 | 原 敬 |
로마자 표기 | Hara Takashi |
출생일 | 1856년 3월 15일 (안세이 3년 2월 9일) |
출생지 | 모토미야, 무쓰, 일본 (현재: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
사망일 | 1921년 11월 4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현재: 도쿄도 지요다구) |
사망 원인 | 자상 |
배우자 | 하라 아사코 (1871–1923) |
소속 정당 | 입헌정우회 |
최종 학력 | 제국대학 (중퇴) |
![]() | |
칭호 및 훈장 | 정2위 대훈위국화대수장 |
중국어 표기 | 간지: 原 敬 히라가나: はら たかし 로마자: Hara Takashi |
정치 경력 | |
직함 | 일본 내각총리대신 |
재임 기간 | 1918년 9월 29일 ~ 1921년 11월 4일 |
군주 | 다이쇼 천황 |
전임자 | 데라우치 마사타케 |
후임자 | 우치다 고사이 (대리) |
총리 재임 기간 | 제19대 |
내각 | 하라 내각 |
겸임 직책 | 제22대 사법대신 (총리 겸임) |
겸임 재임 기간 | 1918년 9월 29일 ~ 1920년 5월 15일 |
역대 내무대신 | 제21, 23, 25대 내무대신 |
역대 내무대신 재임 기간 | 1906년 1월 7일 ~ 1908년 7월 14일 1911년 8월 30일 ~ 1912년 12월 21일 1913년 2월 20일 ~ 1914년 4월 16일 |
역대 체신대신 | 제11, 16대 체신대신 |
역대 체신대신 재임 기간 | 1900년 12월 22일 ~ 1901년 6월 2일 1908년 1월 14일 ~ 1908년 3월 25일 |
의원 | 중의원 의원 |
의원 재임 기간 | 1902년 ~ 1921년 11월 4일 |
관련 내각 | 제1차 사이온지 내각 제2차 사이온지 내각 제1차 야마모토 내각 제4차 이토 내각 제1차 사이온지 내각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하라 사다코 (선처) 하라 아사 (후처) |
장인 | 나카이 히로시 |
양자 | 하라 코 |
기타 | |
별칭 | 평민 재상 |
2. 생애
1856년 모리오카 번사 하라 나오하루의 차남으로 태어나, 1875년 분가하여 평민이 되었다. 기자 생활을 하며 외무성과 농상무성에서 근무하다 1896년 주한 공사로 임명되었으나 1897년 사임하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사장이 되었다.
1900년 입헌정우회 창립에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여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체신상을 맡았다.[19][20][21] 1902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내각 내무상을 역임한 뒤 1914년 입헌정우회 제3대 총재가 되었다.[6]
1918년 9월 28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이 1918년 쌀 소요로 붕괴하자 총리로 취임하여 교육, 교통 기관 정비, 국방 강화, 산업 진흥 등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26] 대외적으로는 중화민국과의 관계 개선, 영국, 미국과의 협조 체제를 구축하는 데 힘썼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군부 인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당 중심의 정치를 확립해 나갔다.
그러나 보통선거제 도입에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보이며 사회 운동을 탄압했고, 1921년 11월 4일 도쿄역에서 나카오카 곤이치에게 암살당했다.[26]
2. 1. 초기 생애
1856년 모리오카 번사 하라 나오하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75년 분가하여 스스로 평민이 되었고, 기자 생활을 하며 외무성, 농상무성에서 근무하다가 1896년 주한 공사로 임명되었다. 1897년 사임하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의 사장이 되었다.[6]하라 다카시(原敬)는 1856년 3월 15일(안세이 3년 음력 2월 9일), 모리오카시 근처 무쓰(陸奥)국의 모토미야(本宮) 마을에서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오하루(直治) 42세, 어머니 리츠(リツ) 32세의 아들로 태어나 겐지로(健次郎)라는 이름을 받았다. 하라가(原家)는 오미(近江) 아사이 씨(浅井氏)의 후예로, 에도 시대에 이와테현 모리오카번(盛岡藩) 남부 씨(南部氏)를 섬긴 가문이었다. 할아버지 하라 나오키(原直記)는 가로(家老), 아버지 하라 나오하루(原直治)는 측용인(側用人)을 지냈다.[6] 아버지 하라 나오하루(原直治)가 가독을 상속했을 당시 록고(禄高)는 227석이었다.[6] 게이오 원년(1865년)에 아버지가 죽자, 12세였던 형 히라타로(平太郎)가 가독을 이었으나, 보신 전쟁(戊辰戦争) 이후 모리오카 번의 몰락으로 가록이 1/10로 줄면서 생활은 급격히 어려워졌다. 리츠(リツ)는 과자 장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하라의 상경 비용도 이렇게 마련되었다고 한다.
15세(메이지 3년, 1870년 음력 1월)에 고향을 떠나 배를 타고 도쿄로 갔다. 번교(藩校) 사쿠진칸(作人館)에서 배우고, 이듬해 12월 상경했다. 명문 일본제국해군사관학교 입학 시험에 낙방한 그는 프랑스인이 설립한 무료 사립학교인 해군준비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다. 나카고로(那珂梧楼)의 사숙을 거쳐, 구 번주 남부 씨(南部氏)가 운영하는 사숙(私塾) 쿄칸기주쿠(共慣義塾)에 입학했으나 오래 다니지 못하고, 구 아이즈 번(会津藩) 무사 키시 토시오(岸俊雄)의 사숙 고신주쿠(苟新塾)로 옮겼다. 그러나 모리오카의 집이 도난당하는 바람에 학비에 어려움을 겪던 하라는 메이지 5년(1872년) 7월에 일시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형제 모두 개명했고, 겐지로(健次郎)는 “케이(敬)”로 개명했다. 이것은 『근사록(近思録)』을 근거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9월에 해군병학교(海軍兵学寮) 시험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겨울에는 프랑스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식비와 숙박비가 무료인 라틴 학교로 옮겼다.
그 후, 일본 법무성(후일의 도쿄대학교) 법과에 입학했지만, 기숙사와 급식 정책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에 책임을 지고 중퇴했다. 신력 1873년(메이지 6년) 4월에 세례를 받고, “다비데(ダビデ)”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요코하마에서 활동하던 펠릭스 에브라르(フェリクス・エヴラール) 신부 밑으로 거처를 옮겨 서로 한서(漢書)와 기독교 서적을 가르쳤다. 이듬해부터 전교 활동에 참여하여 1년 동안 니가타에 머물렀다.
1875년(메이지 8년) 5월, 에브라르(エヴラール)와 헤어진 하라는 모리오카로 돌아갔다. 당시 하라가(原家)는 가록을 반납했고, 그때 받은 일시금을 바탕으로 양잠업을 시작하여 다시 하라를 유학시킬 여유가 생겼다. 재상경과 함께 하라는 분가하여 호주가 되고, 평민으로 편입되었다. 19세에 하라는 가문의 지위인 사족(士族, 귀족이 되지 않은 전 사무라이 가문을 위한 구분) 대신 평민(平民)으로 자신을 분류하기로 선택했다. 하라는 “분가 귀상(分家帰商)”이라고 기록으로 남겼고, 후년에도 숙장에 “이와테현 평민”이라고 크게 적어 기뻐했다고 한다.
다시 상경한 하라는 箕作秋坪의 영어 학당 삼차학사(三叉学舎)에서 수학하였고, 1876년(메이지 9년) 사법성법학교(司法省法学校) 시험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였다. 재학 중에도 101명 중 10위로 성적이 좋았으나, 1879년(메이지 12년) 2월 파면 처분을 받았다. 기숙사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행동에 대한 처분에 항의한 것(뇌정벌(賄征伐))이 이유로 여겨진다. 동시에 파면된 육걸남(陸羯南)·복본일남(福本日南) 등과 함께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나, 중강조민(中江兆民)의 불학숙(仏学塾)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야마나시의 민권파 신문 『협중신보(峡中新報)』에 “와시야마 쇼후(鷲山樵夫)”라는 필명으로 기고하며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우편보지신문사(郵便報知新聞社)에 입사하였다. 입사 초기에는 번역을 담당하였으나, 이듬해 무렵부터는 논설 기사도 다루게 되었다. 하라의 주장은 점진적인 민권 확장을 요구하는 관민 조화론이었고, 급진적인 민권론에는 비판적인, 복자유길(福澤諭吉) 계열의 언론인이었다.
1881년(메이지 14년) 5월, 관료 와타나베 코우키(渡辺洪基)가 전국 순회 여행을 떠나게 되자, 하라는 강력히 요청하여 동행하였다. 이 133일간의 유세 여행에서 하라는 지방의 정치·산업 실태를 관찰하고, 그 내용을 신문에 연재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14년의 정변(明治十四年の政変)으로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파가 정부를 떠나고, 복자유길의 정부에 대한 영향력도 크게 감소함에 따라, 하라의 주장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곧 오쿠마파가 우편보지신문사를 매수하고, 야노 후미오(矢野文雄)를 사장으로 임명하고,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오자키 요시오(尾崎行雄) 등이 입사하자, 하라의 상사였던 쿠리모토 스쿠운(栗本鋤雲)이 퇴사하였고, 자리를 잃은 하라도 1882년(메이지 15년) 1월 26일 신문 상에서 퇴사를 선언하고 회사를 떠났다.
퇴사 후, 오사카에서 정부 계열의 홍보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주선으로, 하라는 4월 24일 발간된 오사카의 정부 계열 신문 『다이토니포(大東日報)』의 주필에 취임하였다. 일약 고액의 연봉을 얻게 되면서 오사카 재계와도 강력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 직전에 결성된 입헌제정당(立憲帝政党)에도 입당하였다. 그러나 10월에는 노선을 둘러싸고 하라는 간부와 대립하여, 7개월 만에 오사카를 떠났다. 1882년, 이노우에 가오루의 요청으로 일본 외무성에 취직했다. 두 사람이 1884년 조선 여행 중 일본 정치의 미래에 대한 견해를 나눈 것을 바탕으로 이노우에는 하라를 톈진 총영사 겸 파리 주재 일본 대사관의 일등 서기관으로 임명했다. 하라는 무쓰 무네미쓰 아래 외무성 차관과 조선 대사를 역임했다.
2. 2. 정치 경력
1900년 입헌정우회 창립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참여하여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체신상을 맡았다.[19][20][21] 1902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이후 내각 내무상을 역임한 뒤 1914년 입헌정우회 제3대 총재에 취임했다.[6]하라 다카시는 내무대신으로 재직하면서 도지사부터 고등학교 교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직급의 지방 정부 관료들을 체계적으로 해임함으로써 실력주의를 구현하려 했다. 그의 권한 아래 있는 모든 공무원은 단순한 호의의 수혜자나 족벌주의의 대상이 아닌, 실제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대체되었다. 이를 통해 하라는 배경이나 계급에 관계없이 재능 있는 사람들이 관료 조직의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1914년, 하라는 사이온지 긴모치를 대신하여 입헌정우회 총재에 임명되었다. 하라의 지도 아래 입헌정우회는 1915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국회의 다수당 지위를 잃었지만, 1917년 총선에서 다수당 지위를 되찾았다.
2. 3. 총리대신 재임
1918년 9월 28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이 무너지자 하라 다카시가 총리로 임명되어 교육기관 확충과 교육제도 개선, 교통 기관 정비, 국방 강화, 산업 진흥 등의 정책을 수행하고 중화민국과의 외교 관계를 완화하고 영국, 미국과 협조 체계를 구축하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군 계열 인사들과도 관계를 유지하며 내각 및 정계를 정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다져나갔다.[26]
1918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는 1918년 쌀 소요로 인해 실각하였고, 하라 다카시는 9월 28일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반인 출신으로는 최초의 내각 수반이었다. 또한 가토 도모사부로 제독이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하는 동안 해군성을 임시로 맡으면서 일본 역사상 최초로 군(軍)의 행정 책임자가 된 민간인이었다.
총리 재직 동안 하원 다수당 지위를 이용하여 보통선거 법안 강행 처리를 거부하여 인기 면에서 고전했다. 그의 신중한 태도는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실망시켰고, 그들은 그가 보통선거를 지연시켜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당 정치인으로서 하라 다카시는 보수파, 관료, 군부의 총애를 받은 적이 없었고, 극우 민족주의자들에게도 널리 혐오받았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일본은 파리 강화 회의에 참가하였고 창립 회원국으로 국제 연맹에 가입하였다. 한국에서는 일본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삼일 운동을 진압하였지만, 이후 일본 지배에 대한 반대를 줄이기 위한 관용적인 정책을 시작했다. 특히 삼일 운동 이후 하라 다카시는 식민지, 특히 한국에 대해 화해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온건파 정치인인 사이토 마코토를 조선총독으로 임명하였고, 군부보다는 주로 민간인으로 구성된 식민 행정을 실시하였으며, 한국인들에게 한국어와 역사를 다룬 학교 교육과정을 (최초로) 포함하는 등 어느 정도의 문화적 자유를 허용하였다. 또한 한국에 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하려고 시도했지만, 궁극적으로 한국인은 일본 제국의 통제하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에게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 전자는 그것을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고, 후자는 그것을 과도하다고 생각했다.
하라 다카시는 정부와 군부 간의 적대감을 증폭시킨 시베리아 개입의 대부분을 감독했다.
하라 다카시의 소위 적극적인 정책 중 대부분은 정치인, 상인, 재벌을 대상으로 했다. 그의 취임 전후 정책 평가에는 차이가 있는데, 여러 차례의 투옥 사건과 국민의 간절한 바람이었던 보통선거법 시행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태도 등이 그 예이다.
원 내각은 물가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의 호황으로 명목 GNP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2.5배 성장했고, 소비자물가지수는 1.66배가 되었다. 원 내각은 외국산 쌀 수입 확대를 단행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산 쌀 50만 석을 매입하여, 데라우치 내각 붕괴의 원인이었던 쌀값 안정을 실현했다. 12월 27일부터 개최된 제41회 제국의회에서는 “4대 정강”이라고 불리는 교육 개선, 인프라 정비, 국방 강화, 산업 무역 진흥의 4가지 정치 목표를 내걸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 재무대신은 대전 종전 후 불황에 대비하여, 국내 이윤을 국채 형태로 모아 국내외 공공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경기를 지지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방침을 취했다. 의회에서 수상은 1인칭으로 “본 대신”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하라 다카시는 “나”를 사용하여 질문에 답변함으로써 평민적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원 내각 출범을 계기로 오랫동안 야마가타파 칙선 의원이 세력을 휘두르던 귀족원에도 변화가 생겼다. 구 봉건 영주·공가 의원이 야마가타파에 반발하여 정우회와 제휴하게 되었고, 그동안 중의원과 대립 상태였던 귀족원에서도 과반수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양원 횡단”이라고 불렀지만, 귀족원에 견제 기능을 기대했던 여론에서는 반드시 환영받지는 않았다.
하라 내각의 물가 안정 정책에도 불구하고, 대전 종전 후 불황은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 물가는 급격하게 상승했다. 호경기로 임금도 상승했지만, 사회 정책은 소홀히 하여 하라는 노동자에게 냉담하고 재계에 후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보수층에서는 개혁이 급격하다고 비난받았고, 개혁파에서는 불충분하다고 공격받았다. 1919년 10월에는 정우회 본부가 방화당했고(헌정정우회 본부 방화 사건), 외무성 야회에서 폭탄 소동이 있는 등 테러 위험성도 높아졌다. 하라 다카시 주변에도 위험이 미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를 걱정한 미우라 고로가 부적을 선물했다. 하지만 하라는 이토 히로부미도 부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암살당했다고 웃으며, 이전과 전혀 똑같이 손님과 계속 만났다.
1920년(다이쇼 9년) 1월 21일부터 시작된 제42회 제국 의회에서는 군비 개량을 위한 장기 계획을 제출했다. 신규 계획만 해도 육군이 4억 8천만 엔의 14년 계획, 해군이 8억 6천만 엔의 8년 계획으로, 예산의 1할을 장기간에 걸쳐 차지하게 될 막대한 것이었다. 재원으로는 소득세·주세 증세와 소득세 종합 과세 제도 도입을 요구했다. 인프라 정비에도 예산을 할애했지만, 사회 정책은 부족하고 개인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모였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 헌정회·국민당·신정회는 공동으로 남자 보통선거 법안을 제출했다. 하라는 보통선거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여성 참정권론자에게도 자금을 제공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무정부주의 조류가 일고 있는 상황에서 보통선거 실시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한편 보통선거 자체를 부정하면 민권 운동이 격화되어 정권이 붕괴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라는 보통선거 운동 민간 대표와 면담 후,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여론이 크지 않고, 다이쇼 정변 때와 같은 큰 물결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2월 26일 제국 의회를 해산했다. 이때, 하라는 보통선거 법안의 옳고 그름을 국민에게 묻겠다고 성명을 발표했고, 이는 이유가 처음으로 명시된 의회 해산이었다.
신문들은 보통선거를 부정한 하라 다카시를 매일 비판했다. 하지만 요시노 사쿠조가 제한선거의 선거인에게 보통선거의 옳고 그름을 묻는 것의 모순을 지적한 것처럼, 5월 10일 제1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정우회는 278석의 절대 안정 다수를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하라 내각은 법무대신에 귀족원의 오오키 토오키치(大木遠吉)를, 신설된 철도대신에 모토다 하지메(元田肇)를 임명하는 소규모 개조를 단행했다. 또한 문관임용령 개정에 다시 착수했다. 국장 자격 폐지는 다시 한번 실현되지 못했지만, 참사관 중 한 명을 정당에서 파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한편 3월 15일부터 주가가 폭락하면서 전후 공황이 발생했다. 7월 1일 제43회 제국의회 소집일에는 의사당 현관에서 폭탄 소동이 발생하는 등, 절대 다수를 차지한 정우회에게 있어 편안한 국회는 아니었다. 하마구치 유키오는 정우회의 재정 정책이 방임주의에 지나치다고 비판했고, 나가이 류타로는 "서쪽에는 레닌, 동쪽에는 하라 다카시"라며 독재적임을 비판했다. 반면 야당 측도 국민적 지지를 널리 받고 있던 것은 아니었고, 예산안은 7월 28일에 성립되었다.
8월 5일, 다나카 기이치 육군대신이 니항 사건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이미 2년 가까이 수상직을 수행해 온 하라는 이 시점이 물러설 적기라고 생각하고, 다나카 기이치의 사퇴와 함께 총사퇴하여 후임 수상으로 기요우라 게이고를 맞이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다나카 기이치의 사퇴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참모본부(군령)에 의한 육군성(군정)에 대한 압박을 끊고 야마가타를 흔들 목적이었다. 하라는 이에 편승하여 야마가타에게 군정의 우월을 인정시켰다. 그러나 야마가타에게 있어 하라 다카시의 후임은 없는 상태였고, 사퇴를 만류했다. 사이온지 긴모치로부터도 유임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하라는 내각을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1921년(다이쇼 10년) 제44회 제국의회에서는 차지차가법·주택조합법·직업안정소법 등 사회 정책 관련 법률이 많이 성립되었다. 한편 각료 스캔들과 야당 공격으로 의사는 자주 분규하고 정치 불신이 심화되어 갔다. 하라 다카시 자신도 궁중 모 중대 사건에서 방관적이었던 것과 여성 서예가에게 집을 제공하여 살게 하고, 거기에 드나들었던 것 등이 비판받았다. 2월에는 유서를 작성했다.
한편 다이쇼 천황 병세가 악화되면서 궁중 문제에도 하라는 관여를 깊게 할 수밖에 없었다. 궁중 모 중대 사건에는 거리를 두었지만,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의 유럽 방문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추진자가 되어, 우려하는 데메이 황후를 설득하여 실현시켰다. 또한 히로히토 친왕의 섭정 취임에도 힘썼고, 그 실현까지는 내각을 계속할 결심을 했다.
7월에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가 개최되자, 하라는 "하느님이 워렌 G. 하딩(미국 대통령)의 머리에 깃들어 이 일을 꾀했다"고 환영했다. 하라는 군축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국내 여론적으로는 유약한 것으로 여겨져 인기가 없었고, 통수권과 관련되어 정부가 간섭하기 어려운 사항이었기 때문에, 해외와 협조한 군축 호소는 천운이었다. 전권 대표 중 한 명으로 가토 도모사부로 해군대신이 선택되었다. 내각 관제 제2조 "내각총리대신은 각 대신의 수반으로서 기무를 奏宣한다"는 규정에서 내각총리대신은 군부 대신을 포함한 어떤 대신의 직무도 대행할 수 있다는 해석에서, 내각총리대신으로서의 하라가 해군대신의 사무 관리를 했다. 육군은 반대했지만, 하라는 육군대신 대행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육군과 맺었다.
원래는 보통선거법 개정(직접 국세 납세 의무를 폐지하고, 만 25세 이상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고 여겨지지만, 하라 다카시 자신은 보통선거법에 반대하지 않았고, 『하라 다카시 일기』에서도 (개정을) 점차적으로 진행해 나가겠다는 뜻을 적고 있다. 하라 다카시가 문제 삼았던 것은 국민의 정치적 성숙도였으며, 타인의 언설에 휘둘리는 주체성 없는 국민이 선거권을 가지는 것을 우려했다. 특히, 일기에서 "민권파나 사회주의자 등 권리만을 요구하는 사상가는 극히 경박하다"고 혹평하며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라 다카시는 스스로 학습하고 의견을 발신할 수 있는 국민 증가에 맞춰 보통선거법 개정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하라 다카시의 정치적 자세에 대해 하라 다카시 기념관 학예원인 다자키 노우미는 "하라 다카시는 눈앞의 이익이나 감언이설을 조종하는 '대중영합'과는 다른 현실주의자, 리얼리스트로서 '공리'를 추구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26]
3. 암살
1921년 11월 4일 도쿄역에서 교토에서 열리는 입헌정우회 교토지부 대회에 참가하러 가던 중 나카오카 곤이치에게 암살당했다.[1] 범인 나카오카 곤이치는 우익 국수주의자이자 철도원이었다. 나카오카는 하라 다카시가 재벌을 일본 정치에 개입시키는 등 부정부패에 연루되었고, 보통선거를 통과시키려 하고, 1년 전 시베리아 개입 당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을 처리한 방식 때문에 암살했다고 진술했다. 나카오카는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지만, 종신형을 선고받았다.[2] 그러나 13년만인 1934년에 출옥했다.
4. 정책
하라 다카시는 총리로서 교육기관 확충 및 교육제도 개선, 교통 기관 정비, 국방 강화, 산업 진흥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22] 중화민국과의 외교 관계를 완화하고 영국, 미국과 협조 체계를 구축했다.[24]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군 계열 인사들과도 관계를 유지하며 내각 및 정계를 정당 인사들 중심으로 운영하는 체제를 확립했다.
1900년 입헌정우회 창립에 참여하고 제4차 이토 내각에서 체신대신을 역임하며 철도 부설법 개정에 착수했으나 귀족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2] 1901년 제1차 가쓰라 내각이 출범하자 정우회는 야당이 되었고, 하라는 당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1902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1911년 제2차 사이온지 내각에서는 내무대신 겸 철도원 총재를 역임하며 행정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보통선거제 도입에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이었고, 사회 운동은 사회 질서 혼란을 이유로 탄압했다.[22]
4. 1. 교육 정책
1918년 9월 28일 총리로 임명된 하라 다카시는 교육기관 확충과 교육제도 개선 정책을 수행하였다.[22]4. 2. 교통 정책
하라 다카시는 내무대신으로 재직하면서 철도원 총재를 겸임하며 교통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22] 그는 철도 부설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며, 제2차 사이온지 내각에서는 철도 부설 예산이 부활되지 않으면 사직하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1900년 제4차 이토 내각에서 체신대신으로 취임한 하라 다카시는 철도 부설법 개정에 착수했지만, 귀족원의 반대로 법안 제출을 포기해야 했다.[22] 1902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모리오카시에서 당선되었는데, 이는 모리오카로 연결되는 철도선 문제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4. 3. 외교 정책
하라는 1919년 1월부터 시작된 파리 강화 회의에 사이온지 긴모치를 수석 전권, 마키노 노부아키를 전권으로 하는 전권단을 파견했다.[24] 마키노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새로운 외교를 지지하고 미국과의 협조 노선을 취하는 등 하라와 의견을 같이했다. 대표단에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문제에는 가급적 관여하지 않고 연합국과 공동 보조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훈령이 내려졌다. 이 때문에 일본 대표는 거의 발언하지 않는 "침묵의 파트너"라는 비판을 받았다. 추밀원의 이토 미요지 등은 강경한 의견을 내놓았지만, 하라는 대표단의 재량을 인정하고, 대표단이 한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일본 측이 제안한 인종 차별 철폐 제안이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반발을 받았을 때에도, 국제 협조를 우선하여 실현에 고집하지는 않았다.하라는 1918년 중화민국과의 외교 관계를 완화하고 영국, 미국과 협조 체계를 구축하였다.[24]
4. 4. 기타 정책
하라 다카시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국방 강화와 산업 진흥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23]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앞두고 군비 증액 요구를 억제하고, 시베리아 파병 병력을 축소하는 등 국제 정세 변화에 대응했다.중화민국에 대해서는 베이징 정부와 남방 정부 세력 간의 화해를 중재하는 한편, 재정난을 겪는 베이징 정부를 지원했다. 또한, 아편 밀매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9년 2월에는 관동주 조차지에 관동청을 설치하여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관하고, 대만 총독에 문관 출신 덴 켄지로를 임명하는 등 식민지 통치 방식에도 변화를 꾀했다. 조선에서도 민정 이관을 추진하려 했으나, 3·1 운동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후 조선 통치는 "내지연장주의"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1921년 제44회 제국의회에서는 대지법, 차가법, 주택조합법, 직업안정소법 등 사회 정책 관련 법률을 제정하여 사회 문제 해결에도 힘썼다.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 개최를 환영하며 군축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국내 여론의 반발과 통수권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5. 평가
하라 다카시는 ‘평민 재상’으로 불리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입헌정우회를 이끌며 일본 정당 정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0][31][32][33]
집권 기간 동안 교육 기관 확충, 교통망 정비, 산업 진흥 등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 호황을 배경으로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펼쳤다. 대외적으로는 중화민국과의 관계 개선, 영국, 미국과의 협조 체제 구축에 힘썼다.[9][10][11][12][13][14][15][16][17][18][19][20][21]
그러나 보통선거 도입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사회 운동을 탄압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당시 러시아 혁명 등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 사상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보통선거 실시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라는 국민의 정치적 성숙도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주체성 없는 국민이 선거권을 가지는 것을 우려했다. 그는 “민권파나 사회주의자 등의 권리만을 요구하는 사상가는 극히 경박하다”고 비판하며, 점진적인 보통선거 도입을 구상했다.[26]
하라의 정치 스타일은 현실주의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상주의보다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했으며, 때로는 임기응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은 『중앙공론』 1914년 4월호에서 이상주의자였던 가토 고메이와 대조적으로 “하라는 유통을 악으로 보지 않고, 임기응변을 좋아하며, 성공을 최우선으로 한다”고 평가되기도 했다.
입헌정우회 총재가 된 후에는 원만한 태도와 포용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태양』 1921년 12월호에서는 정우회 총무 시절에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듯한 논쟁을 벌였지만, 총재가 된 후에는 원만해졌고, 청탁을 함께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지녔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적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하라의 사망 소식에 “하라라는 남자는 정말 위대한 남자였다. 그런 사람을 함부로 죽이다니 일본은 망할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31]
6. 유산
原日記|하라 일기일본어로 알려진 하라 다카시의 일기는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한 가장 귀중한 1차 사료 중 하나이다.[1] 여기에는 하라 다카시의 일상 활동 대부분과 당시 정치 인물에 대한 의견과 생각이 기록되어 있다. 하라의 일기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며, 역사가들에게는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광범위한 정보를 심층적으로 보여준다.
原敬日記|하라 일기일본어는 일반적으로 1875년(메이지 8년) 귀향했을 때부터 암살 직전인 1921년(다이쇼 10년) 10월 25일까지 기록된 일기의 총칭이지만, 하라 다카시는 암살을 예상하고 유서에서 "당분간 세상에 내놓아서는 안 된다"고 엄명하였다. 이는 궁중의 어떤 중대한 사건이나 다이쇼 천황의 병상 문제에 대한 기록을 고려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초판은 하라 다카시 사후 30년 가까이 지난 1950-51년에 간겐샤(乾元社)에서 전9권으로 간행되었다. 최근에는 하라 다카시가 다이쇼 천황과 가까웠던 점을 고려하여 다이쇼 천황과 原敬日記|하라 일기일본어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 原敬日記|하라 일기일본어 전6권, 하야시 시게루(林茂)·하라 곤(原貢) 편, 후쿠무라 출판(福村出版), 신판 2000년
- 原敬日記|하라 일기일본어 전17권, 이와카베 요시미츠(岩壁義光)·히로세 준코(廣瀬順晧) 편, 호쿠센샤(北泉社), 1998년
- 쿠리타 나오키(栗田直樹), 原敬日記を読む|하라 일기를 읽는다일본어, 세이분도(成文堂), 2018년 (해설서)
7. 가족 및 친족
- 전처 나카이 사다코(中井貞子)는 사쓰마 번 번사였던 나카이 히로시의 장녀이다. 하라 다카시가 톈진 영사로 부임하기 직전인 1883년에 15세의 나이로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고, 1896년부터 별거했다. 이후 사다코가 불륜으로 아이를 임신하여 1905년에 이혼했다.[35]
- 후처 아사(浅)는 이와테현 에사시군 이와야도정 출신 스가노 야타로의 딸로, 도쿄 신바시의 '홍엽관' 게이샤였다.[34] 아사는 아사쿠사에서 태어났으며, 15년간 첩으로 지내다가 1908년 정처와 이혼이 성립된 후 정식으로 입적했다.[35]
- 양자(조카의 아들) 미쓰(貢)는 작가이다.
하라 가문(原家)의 시조인 미타무라 헤이베에 마사즈미(三田村平兵衛政澄)는 아자이 신자에몬 다다마사(浅井新左衛門忠政)(오미의 아자이 씨)의 둘째 아들 미타무라 사에몬다유 사다모토(三田村左衛門太夫定元)의 후손 미타무라 다로에몬 마사타케(三田村太郎右衛門政武)의 둘째 아들로 지쿠고에서 태어났다.[36]
미타무라 헤이베에 마사즈미(三田村平兵衛政澄)(후에 하라 씨로 개명)━헤이베에 마사후네(平兵衛政舫)━주조 마사나오(十蔵政直)━시게히라 마사치카(茂平政親)━헤이베에 마사요시(平兵衛政芳)━나오키 요시타다(直記芳忠)━헤이베에 요시타케(平兵衛芳武)━나오키 요시타카(直記芳隆)━나오지 마사나카(直治政中)━하라 다카시━미쓰구(貢)
8. 관련 작품
- 原敬일본어 (1965년, NHK, 배우: 柳永二郎일본어)
- 熱い嵐일본어 (1979년, TBS, 배우: 岡田英次일본어)
- 足尾から来た女일본어 (2014년 1월 18일, 1월 25일, NHK, 배우: 國村隼일본어)
- 経世済民の男 高橋是清일본어 (2015년, NHK, 배우: 堀内正美일본어)
- 青天を衝け일본어 (2021년, NHK大河ドラマ일본어, 배우: 石丸謙二郎일본어)
- 能條純一일본어 작화 昭和天皇物語일본어 (2017년부터, 小学館일본어 ビッグコミックオリジナル일본어 연재)
- 平谷美樹일본어 国萌ゆる 小説 原敬일본어 (2021년, ISBN 978-4408537955)
참조
[1]
서적
Political Bribery in Japan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Hawaii Press
[2]
뉴스
Nakaoka
https://www.newspape[...]
Sioux City Journal
2023-07-20
[3]
웹사이트
【原 敬 略年譜】
http://www.haratakas[...]
[4]
웹사이트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原敬」の解説
https://kotobank.jp/[...]
[5]
웹사이트
旺文社日本史事典 三訂版「原敬」の解説
https://kotobank.jp/[...]
[6]
간행물
国史大辞典「原敬」
国史大辞典 (昭和時代)
[7]
뉴스
【わがまちお宝館】原敬記念館(盛岡市)わんこそば「原さん」が?
朝日新聞
2018-12-05
[8]
논문
近代日本における旧身分意識と族称 -士族・平民の廃止について-
駿台史學174号
[9]
간행물
官報
官報
1883-11-27
[10]
간행물
官報
官報
1885-08-19
[11]
간행물
官報
官報
1885-08-18, 1885-10-14, 1886-01-23
[12]
간행물
官報
官報
1886-03-31
[13]
간행물
官報
官報
1889-04-29
[14]
간행물
官報
官報
1892-03-15
[15]
간행물
官報
官報
1892-08-16
[16]
간행물
官報
官報
1892-08-17
[17]
간행물
官報
官報
1892-09-08
[18]
간행물
官報
官報
1895-05-23
[19]
간행물
官報
官報
1896-06-12
[20]
간행물
官報
官報
1897-02-24
[21]
간행물
官報
官報
1897-09-02
[22]
간행물
官報
官報
1900-12-22
[23]
서적
それでも、日本人は「戦争」を選んだ
朝日出版社
2009-07
[24]
서적
戦争まで 歴史を決めた交渉と日本の失敗
朝日出版社
2016-08
[25]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2010
[26]
웹사이트
没後100年、原敬ってどんなひと?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22-01-09
[27]
웹사이트
日本のキリスト教徒率は1% 首相経験者の13%はキリスト教徒
https://www.news-pos[...]
NEWSポストセブン
2022-06-13
[28]
웹사이트
故・原敬首相の十字架の遺品見つかる
http://www.christian[...]
クリスチャントゥデイ
2022-06-19
[29]
뉴스
なぜ東北人は仙台育英V「白河越え」に熱くなるのか? 戊辰戦争からの鬱屈が・・・!?
https://newsdig.tbs.[...]
TBC東北放送
2022-08-27
[30]
서적
元老 西園寺公望
文春新書
2007
[31]
서적
元老 西園寺公望
文春新書
2007
[32]
논문
西園寺公望はいかにして最後の元老となったのか:「一人元老制」と「元老・内大臣協議方式」
京都大學文學部研究紀要
1997
[33]
서적
元老―近代日本の真の指導者たち
中央公論新社
2016
[34]
서적
明治美人伝
https://www.aozora.g[...]
1921
[35]
서적
大宰相・原敬
PHP研究所
2013-11-25
[36]
서적
姓氏類別大観
[37]
간행물
従五位原敬外務省通商局長ニ任叙ノ件
国立公文書館
1893-11-10
[3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0-12-28
[3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1-12-14
[4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2-09-27
[4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3-12-18
[4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5-07-01
[4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7-11-01
[4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7-10-12
[4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4-01-31
[4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1-11-04
[47]
간행물
賞勲叙任
官報
1885-08-19
[4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3-12-29
[4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5-06-22
[5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6-06-17
[5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7-09-23
[5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4-04-06
[53]
간행물
辞令
官報
1916-12-13
[54]
간행물
授爵・叙任及辞令
官報
1920-09-08
[55]
간행물
辞令
官報
1922-02-14
[5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8-07-10
[5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9-05-20
[5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6-03-07
[5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6-03-21
[6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6-11-02
[6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7-05-03
[6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7-05-25
[6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8-02-29
[6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1-10-06
[6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9-10-21
[6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0-10-25
[67]
뉴스
俳優 村上弘明さんが岩手の魅力を発信!
https://kyodonewsprw[...]
共同通信PRWire
2018-12-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